기타

국제 킬로그램원기의 변화

골라잡앗 2021. 8. 26.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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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은 측정학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혁명 세력은 오류와 남용에 취약한 옛 도량형을 단순히 개혁하는데 머물지 않고 과학 아카데미에서 제안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도량형을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시대를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해" 고안된 이 도량형은 길이와 무게 표준을 자연 표준에 연계했습니다. 미터는 파리를 지나는 자오선의 4000만 분의 1로, 킬로그램은 물 1세제곱데시미터의 무게로 정의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연 표준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발상이 실현 가능성이 없음이 입증되자, 1799년에 제작되어 프랑스 국가 기록원에 보관된 에탈롱을 길이와 무게 단위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추진하는 개혁은 자연의 상수를 단위 표준의 근거로 삼으려는 18세기의 목표를 마침내 이루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미터법은 단순하고 합리적이었지만 프랑스에 정착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뒤이어 다른 나라들도 조심스럽게미터법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국가적 통일을 도모하고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국가 경쟁력을 키우고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려는 등 동기는 다양했습니다.1875년에 미터 협약이 체결되면서 미터법의 감독 권한이 프랑스 손을 떠나 국제 기구도량형국에 넘어 갔습니다. 또한 국제도량형국은 혁명 세력이 만든 미터와 킬로그램을 대체 할 새 표준인 국제 미터원기와 국제 킬로그램원기를 제작하는 일에 착수 했습니다. 두 원기는 1879년에 제작되어 1889년 공색 채택되었지만,, 기록원의 미터와 킬로그램에 맞추어 교정되었습니다.

 

국제도량형국이 맨 처음 맡은 임무는 원기를 관리하고 회원국의 부원기를 교정하는 것이었지만, 20세기 초반에 전기, 빛, 방사선 등의 단위로 범위를 넓혔으며 미터법을 확대하여 초와 암페어를 포함한 MKSA 단위계를 확립했습니다. 한편 과학자들은 마이컬슨과 몰리의 간섭계 기술을 개선시켜 미터원기에 버금가는 정확도로 길이를 측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중대한 변화가 있었는데 첫 번째 변화는 크립톤 86의 광학 전이에 대응하는 복사선을 이용하여 미터를 재정의하였습니다. 두번째는 미터법을 대신하여 측정학의 전 분야를 포괄하는 더욱 큰 체계를 확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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